20160911 한백 삶의 고백


그녀의 이름은 마자라티”. 처음 메일을 보냈을 땐 거절당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뒤 똑같은 메일을 다시 보냈는데, 그때서야 긍정의 대답을 얻었습니다. 출국행 비행기. 나눠주는 잡지 중 슈피겔 지를 골랐습니다. 마침 이주의 테마는 집구하기 전쟁이었습니다. 독일 도시들의 집값이 하늘로 치솟고 돈이 있어도 살집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내심 안도했습니다. 나의 마자라티가 장기출장 중이어 비어있는 그녀의 방을 제게 빌려주기로 했거든요.

신분도 분명하지 않은 외국인이 현지에서 방을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3개월만 살다 올 생각이므로 웬만큼 가구가 갖춰진 집이어야 했으므로 저는 출국하기 전 왕슈퍼울트라 검색 더듬이를 최대한 펼쳐서 열심히 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도 마자라티가 마음을 바꿔서 얼굴도 못보고 신분도 분명하지 않은 저를 받아주어 편한 마음으로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마인츠에 도착하니 이미 해가 져있었습니다.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간데다 나를 스마트하게 해주는 폰은 아직 사용가능하지 않고, 구글어스의 입체지도로 집이 어디 붙어있는지 한국에서 확인하고 갔으나 아뿔사. 이민가방 두 개를 들고 껌껌한 거리에서 주소의 아파트를 찾기란 장님 길찾기나 마찬가지였지요. 무거운 가방들 질질 끄시고 낑낑거리며 겨우 찾아낸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 나온 사람은 써프라이즈~ 그녀가 아니라 그. 제가 혼자 이름어감상 여성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더구나 이름은 마다라티”. 인터넷이라 이름을 조금 바꿔올렸답니다. 그리고 본인도 마다라티지만 본인은 몇 달 전 시리아에서 와 막 난민신분증을 받은 마다라티고, 원래 집주인 마다라티는 사촌형인데 일이 있어서 자기가 대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지금 어학원을 다니며 독일어를 배우고 직업을 구하고 있다고 사촌동생 마다라티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습니다. 작은 원룸인 방 여기저기와 베란다에는 서로 짝도 맞지 않고 삐걱대는, 여기저기서 주워다 놓은 것 같은 가구들이 늘어져있었습니다. . 이게 도대체 뭐지.


이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나의 그녀, 아니 그, 마다라티와 톰과 제리의 싸움 같은, 별거 아니지만, 끈질긴 신경전 같은 것을 벌이면서 마인츠에서의 세 달을 보냈습니다. 마다라티는 누가 와서 자기를 찾으면 없다고, “나는 마다라티 여자친구라고 말하라 했습니다. 집에 뭔가 고장나 아파트 관리자가 와서 고칠라 치면, 아침 7시도 안되서부터 방에 들어와 본인이 방에 원래 사는 것처럼 꾸몄습니다. 매달 방 임대료를 낼 때마다 본인 스케줄 때문이라며 일찍부터 독촉해대었습니다. 마다라티는 출장이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촌들? 친구들?과 같이 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본인이 사는 집이라고 했으나 실제 살았던 적은 없는 듯 했습니다. 아 이런.... 나는 나대로 불안해졌습니다. 시리아에서 왔다더니. 난민들이 시민증을 받게 되면 나라에서 집을 주는데, 친구들이랑 모여 살고 받은 집으로 장사를 한다더니... 인터넷에 이름도 속여올리고, 나한테 거짓말도 시키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다라티와 이런저런 일로 부딪히면서 저는 점점 히스테릭해져가고 급기야는 이 놈이 결국엔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나는 결국 처음에 낸 보증금 500유로(우리돈으로 75만원)를 돌려받지 못할지도 몰라라는 불안에 휩싸여갔습니다. 저는 저대로 다음 학기에 오면 묵을 집을 마련해야 하니 보증금을 좀 땡겨서 달라고, 과부 사정은 홀애비가 안다고, 너도 정착할 때 힘들었을테니 나를 좀 도와달라고 사정하면서 나름의 꼼수를 썼지만, 대답은 너 나가는 마지막 날 돌려줄 수 있어였습니다.


그랬던 어느날, 마다라티는 또다시 제 날짜에 본인이 마인츠에 없다는 이유로 임대료를 일찍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저는 저대로 마음이 뒤틀려 절대 줄 수 없다고 나중에 오라고 (둘다 모국어도 아닌) 문자로 싸움질을 해댔습니다. 급기야 아파트 앞에 와있다는 문자를 보고 돌아버린 나는 이성을 잃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다라티는 떠나고, 남은 나는 열쇠를 방에 두고 문을 닫아버렸다는 것을 방 문앞에서야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독일집들의 문은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잠깁니다. 철두철미하기로 유명한 독일애들이 만든 철통같은 문은 마치 나를 놀리듯 꼼짝않고 꽁꽁 닫혀있었습니다. 한밤중 열쇠수리공을 부르고.... 인건비가 비싼 것도 알았고, 근무시간외라 추가지불금이 더 있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헉. 계산서를 보니 450유로. 딱 한달치 임대료 값이었습니다. 제가 이성을 잃어 제발에 제 등을 찍었습니다. 못받을까봐 불안했던 보증금 정도의 금액을 날리고 나니, 그때서야 오히려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더군요. 못받으면 말지.

 

난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나에게 온 타자에 대해서 절대적 환대를 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난민이 받아서 장사하는 집에 세 달 동안 살면서, 나에게 거짓말을 해대며 나를 이용해먹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로도 힘들었지만, 책상에 앉아서 쓴 논문의 절대적 환대는 커녕 끊임없이 상대방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에 대한 대면이 너무나도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슈피겔 지의 테마였던 집구하기 전쟁은 집값이 뛰고 집구하기 힘들어진 사정에, 난민이 많아져서이다라는 세간의 소문에 대한 기획기사였습니다. 실은 안정된 독일의 중산층 가구가 난민 때문에 집값이 뛰거나 집을 못구하거나 할 일은 없습니다. 난민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의 집은 사회에서 비슷한 계급에 있는 실업자나 복지계층, 이민자, 가난한 학생 정도가 서로 경쟁하는 구도일테니 말입니다. 제가 억울했던 다른 한 가지는 결국 나도 마다라티 너와 다를 바 없는 떠돌이 신세이고, 왜 결국 우리끼리 물고 뜯고 이용해먹고 싸워야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확실히 정해지진 않았지만 다음달이면 다시 또 외로운 떠돌이로 살아가야 됩니다. 아마도 예전 독일에서의 힘들었던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 때문인지 저는 외국에서의 삶이 두렵습니다. 더구나 절대적 환대의 털끝에도 못미치는 저의 인격의 한계를 경험해서인지 제가 쓰는 논문에 대한 회의는 매일매일 정말 갈 것인가하는 자문을 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가 나의 존재에 대한 환대의 기본조건이라는 희망을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낯선 타자도 환대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크고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우리끼리도 마음을 모아 저들은 경험하지 못할 하나님나라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왕 쓰는 논문, 냄비 받침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조금이라도 쓸모있고 도움이 되는 작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도 타자이셨으며 언제나 변함 없이 타자를 친구로 초대하고 환영하셨던 예수님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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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밥(nowhere79)
삶에의 진실한 대면. 삶이 녹아있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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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사이in-between

- 한국 개신교의 북한교회 재건운동을 통해 본 통일선교 방향 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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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 계시는 하느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라. 그 백성에게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에즈라 13, 표준새번역 개정판)

 

BCE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50~70여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직 야훼만을 부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이들이 고향 땅에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하려 했던 일은 바로 성전 재건이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약탈당했던, 그리고 칙령에 의해 되돌려받은 성전기물들을 가지고 드디어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그들의 꿈이었던 성전재건의 실현은 순조롭지 못했다.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에 의해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던 그들의 계획은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왜 아니었으랴. 고향은 이미 그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부모로부터 들은 상상 속에서의 고향이 아니다. 그간의 세월동안 땅도 사람도 변해 있는 것을 보면서 기대했던 마음과는 달리 당혹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다.

낯설어져버린 고향에 살고 있는 알지 못하는 타자들과 그들은 잘 어울려 살아갔을까? 역사의 현실은 그러지 못했던 듯하다. 성전재건 이야기에는 팔레스틴에 남아있던 자들, 공동번역성서에 의하면 제 땅을 갈아먹는 사람들(에즈4,4)’로 알려진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재건역사로부터 말도 섞지 않고, 마주치지 않으려 부러 가까운 길도 돌아가는, 2성서시대까지도 내려오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어갔던 이스라엘의 신앙을 뿌리로 하는 종교라 그런지, 그리스도교는 모든 선교의 중심을,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부터 해왔다. 더군다나 해방 전 북한에 큰 교세를 가지고 있던 한국 개신교에게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그 선교적 당위성 면에서나, 신앙의 감성적 노스탤지어에 있어서 북한 선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었다.

이 글은 원래 그러한 성전 재건의 역사 속에서 벌어졌던 권력다툼, 배제와 차별이라는 찝찝한 기시감과 북한교회 재건운동하면 생각되는 한국개신교의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선교의 내용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한계는 분명하고 역사는 뻔히 답습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의 북한교회 재건운동의 자료와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여러 갈등과 분열이라는 위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또한 분단 상황이라는 답답함과 급변하는 남북관계, 국제정세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현재태로써 반응하고 변화하며 나름대로의 고민과 해답을 찾아가려는 진정한 신앙의 실현으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해방 이후, 특히 9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의 북한 교회 재건운동의 내용을 간략하게 돌아보면서 그 가능성과 한계를 성찰하려고 한다. 특히 그 역사를 보았을 때, ‘북한선교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북한 교회 재건운동의 방향이 점차적으로 통일선교로 이어지고 있는 점에서, 북한 교회 재건운동으로부터 단순히 통일 후를 대비한 정책이 아니라 분단 체제의 현실 속에서도 발휘되는 선교의 현재성을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최고조로 경색되고, 그동안 그나마 있어왔던 경제, 사회, 종교적 교류마저 더욱 얼어가는 시대에, 대안을 제시하기가 어불성설이 될 수 있겠지만, 이런 때일수록 지금까지의 발걸음을 되돌아보고, 지금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 앞으로의 갈 방향을 재설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글은 먼저 한국 개신교에서 북한 교회 재건운동을 주도해왔던 한기총의 설립배경을 시작으로,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북한 교회 재건운동의 시작과 경과, 그리고 현재까지의 결과를 돌아보고 선교신학적 맥락에서 그 긍정성과 부정성을 분석한 후, 그 양면성을 다 넘어선 분단 공간의 해체라는 상상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분단이라는 이분법적 공간은 그 공간 안에서만 생각하는 이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설 수 없게 만드는 듯 하다. 현실은 벽인 듯 보이지만, 그러나 늘상 현실타계의 시작점은 꿈이라는 환상, 상상력으로부터 나온다.

 

2.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설립배경과 북한교회재건위원회 설치(1995~2002)

해방 전 북한에 얼마나 많은 교회와 개신교 신자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방 이후 개신교 측의 각종 문서에는 약 30만명으로 주장되고 있고, 한기총의 북한교회 재건위원회에 따르면 교회수도 평안북도에 755, 평안남도 724, 황해도 870, 함경도 492, 강원도와 경기도에 194개 등 총 약 3천 여개의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강인철은 1940년에 북한 개신교 인구가 23만 명가량으로 파악되고, 1930년대 말부터 해방 시점까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신자 수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였던 것을 고려하여 해방 당시 북한지역의 개신교 신자를 약 2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어쨌든 해방 전 북한의 개신교 인구는 한반도 전체 개신교 인구의 70~80%에 해당할 정도였던 듯 하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시기(1945~1952)까지 북한의 개신교 인구 중 약 35~40%에 해당하는 7~8만 명이 월남(전체 월남자는 북한 인구의 10.7~14.7%, 천주교 월남자는 천주교 인구의 24.6%(최소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4명 중 1명 이상이 월남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북한의 개신교인들 중 월남자들이 유독 많았던 이유는 강경한 반기독교적 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한 이후, 종교핍박을 피해 내려온 목회자들을 포함한 신자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개신교 교세가 가장 활발했던 서북지역(평안도, 황해도)의 신도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부농과 무역가, 기업가, 상인, 수공업자 등 성공한 중산계층이 많았는데, 이들이 토지개혁의 주요 피해대상이 되면서 월남했기 때문이다.

 

남한에 내려온 월남 개신교인들은 남한의 교회를 피난처로 삼고 남한사회 안에서 매우 응집력 있는 집단으로 존속해왔다. 한경직 목사가 세운 영락교회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영락교회는 월남자들을 대상으로 한 구호 및 안내 활동의 집결지이며, 물적 토대였다. 이미 1947년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월남하여 서울에 거주하던 장로교 목사 20여 명이 이북신도대표회를 발족시켰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적극적이고 막대한 재정지원 등을 뒷받침으로 망명 총회와 같은 위세를 떨쳤다. 이미 전쟁 중에 시작된 남한 장로교와 감리교의 무지역 노회(망명 노회) 제도 도입은 이미 많은 수가 이탈되고, 남은 이들마저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된 북한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남한교회와 신자들을 주체로 무너진 동양의 예루살렘의 재건을 반항구적 선교적 과제로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남한 개신교는 공격적 형태의 강한 반공주의 집단이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월남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잃어버린 고향으로의 회귀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월남자 교회는 이후 남한의 지역노회로 흡수되기도 했지만, 월남 목회자 그룹은 나름의 세력을 형성해가고, 전쟁 이후 복구 물자 지원을 토대로 한국교회 성장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감성적 바탕인 반공주의는 해방과 전쟁 직후 공포수동적 증오의 정서였다면, 1990년대로 오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적극적 증오의 정치로 다시 급부상한다. (그리고 2000년대 현재 동성애 반대와 함께 혐오의 정치로 다시 한 번 미끄러져 내려온다.) 80년대 후반 87년 체제 이후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민주화 이행기로 접어들고, 국제적으로는 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면서 북방정책이 추진되었다. KNCC(한국교회협의회) 또한 1988년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통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고백하고 그동안의 반공주의 노선에서 탈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협의 통일선언에 반대하는 한국 개신교의 보수세력은 강한 결집력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러한 결집이 모아져서 198912, 그동안의 간헐적이고 느슨했던 교회협의 연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국 개신교 최대조직이자 개신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 결성되었다. 반공주의의 위기의식에서 발현된 이러한 결집에서 월남자들은 다시 한번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처음 발기인 10인 중 9명이 월남자들이었고,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역대 교단장 출신 인사 14명 중 8명이 북한 출신이었으며 초대를 제외한 2대부터 5대까지의 대표회장이 다 이북 출신 인사였다.

 

한편 한기총의 설립의 주요 합의내용 중 하나는 공산권이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하루속히 하나의 연합체를 조직하여 남북통일을 실현시키기 위해 북한선교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기총의 주요조직들을 보면 남북교회협력위원회속에 북한동포돕기선교본부, 북한교회재건운동본부, 통일선교정책연구원, 통일선교대학, 자유이주민정착지원본부, 해외남북교회협력위원회 등 다른 위원회에 비해 많은 산하기관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기총이 북한선교를 그 핵심사업으로 두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방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노태우 대통령의 ‘77 특별선언’,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부의 완화된 대북 정책, 역시 같은 해의 동서독 통일과 공산권 국가들의 붕괴 및 노선의 변경은 남한 개신교에게 임박한 통일에 대한 기대감과 그만큼 통일문제에 대한 긴박감을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자연재해로 인해 연속적인 흉년이 들자 북한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면서 탈북자가 속출하고 더구나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북한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한기총은 1993년 먼저 북한교회재건전문위원회를 결성하고 준비를 통해 1995년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격상시킨다. 북한교회재건위원회는 그 목적을 임박한 통일을 앞에 둔 시기에 북한 동포들에게 떡과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한 일을 준비하는 기관으로 하고, 북한교회재건위원회와 북한교회재건모금위원회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아래와 같은 북한교회 재건의 3원칙을 마련했다.

 

첫째, 북한에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은 곧 창구의 일원화를 원칙으로 한다(연합의 원칙).

둘째, 북한에 교파 교회를 지양하고 단일기독교단으로 세운다(단일의 원칙).

셋째, 북한 교회를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교회로 세운다(독립의 원칙).

 

경쟁적 선교의 폐해를 방지하고, 선교지 본토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선교신학적 원리에 충실해보이는 위의 3원칙은 내용 자체만으로는 북한교회 재건 시에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상황들을 미리 방지하고, 상호주체적인 북한선교의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심하게 분열되어있는 남한의 개신교의 하나됨에도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교단 간 목소리를 조율하고, 각 교회들에게 재건할 북한의 교회들을 배정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원칙들과는 달리 한국교회의 현실적인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북한교회재건위원회는 1999년까지 북한에 존재했던 3040개의 교회를 발굴하고, 각 교단의 교세를 고려해 재건할 교회들을 나누어 배정하고, 재건기금 마련을 독려하는 한편, 탈북자들을 포함하여 실제로 북한에 들어가서 교회를 재건할 사람들을 선발하여 훈련, 양성하는 계획을 세우기까지 하였지만, 연합의 원칙과는 달리 한기총에 속하지 않은 교단들과의 사전협의나 의견 조율에 노력하지 않아 북한교회 재건운동의 기득권을 선취하려는 정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실제로 1991년 부활한 감리교 서부연회는 결국 한기총과는 별개로 따로 평안도 지역에 있었다는 388개의 교회의 재건운동을 모색해나가게 되었다.

또한 한기총 스스로도 북한교회 재건사업 지침(2000)에서 그동안의 북한교회 재건운동이 선교지 식민화와 남한교회의 북한교회 이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고, 통일 이후의 북한 교회 건축에만 집중이 되어있었음을 반성한다. 통일 이후, 또는 적어도 북한과의 관계 개선 이후에 가능한 북한교회 재건에 대하여 복잡한 관계 현실은 망각하고 노력하지 않은 채, ‘교회 건축이라는 그동안의 성장주의적 한국교회에게 좀더 익숙하고 눈에 보이는 방향 쪽으로 흘러버림으로써 결국은 재건기금을 마련하는 것 이외에는 제자리걸음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인식했던 것이다. 실제로 이후 한기총의 북한교회재건운동은 그동안의 한계를 인식하고, 처음의 태도와는 달리 조그련(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 소속된 교회들을 인정하고 교류와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교단 간의 기득권 싸움과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혼선을 빚으며 표류하고 있다.

 

 

3. 북세연(북한교회세우기연합)의 활동과 현재성고민(2006~현재)

 

2006년 한기총의 북한교회재건위원회 총무였던 김중석 목사를 중심으로 북세연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었다. 북세연은 한기총의 북재위 활동을 두고 한국교회가 십여 년 전 북한에 과거 존재했던 교회들의 재건을 계획하고 준비한 바 있으나 그 일이 지난 8년여 동안 거의 중단되어 있다고 평가하면서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각 교단이 경쟁적으로 각개약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동일사역에 이중지원, 교단 간 갈등, 대북협상력 약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한국교회의 대북사업에 있어서 연대가 절실하고 시급함에 따라 한국교회의 진보, 보수를 망라한 전체 교단 단체 개인이 참여할 수 있는 단체의 필요성에 의해 북세연을 조직한다고 밝히고 있다.

북세연은 한기총의 북한교회 재건 3원칙인 연합의 원칙, 단일의 원칙, 독립의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고, 한기총이 발굴해낸 북한의 3천 교회를 재건하는 것과 동시에 12천개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의 운동의 한계의 경험을 토대로, 좀더 열린 자세로 대북선교의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 한데, 예를 들면 보수적 교단들의 북한의 복음화와 진보적 교단들의 평화적 통일선교운동의 양방향을 다 인정하고, 아우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북한을 더 이상 남한과 같은 동질적인 사회로 보지 않고 새롭게 접근해야할 선교지로 보고 북한교회 재건운동 역시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인식 위에서 접근해야 할 미래적 사역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북세연은 북한교회기도결연, 한국교회탈북자품기, 북한선교전문대학원 등의 사역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의 북세연의 활동들을 보면, 처음 설립했을 때와는 달리 여러 가지 현실적인 고민과 성찰 속에서 방향을 조금씩 수정해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20123월 정기포럼에서 김중석 북세연 사무총장은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김정은 정권이 무너지고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그들의 생각과 신앙이 쉽게 바뀔 거라는 생각은 아마추어들의 생각이라고 꼬집었다. 선교적인 열정과 함께 전문적인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또한 그러한 연구들 가운데 보수와 진보 신학자 및 목회자가 함께 만난 최근의 한 좌담회에서는 1) 북한교회 재건은 대북지원과 사회봉사의 형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 2) 남한 교회가 돕되 주도권은 북한교회가 가질 수 있도록 할 것, 3)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그루터기교회, 지하교회를 모두 인정할 것, 4) 해방 전 북한에 두고 온 재산을 교회가 먼저 포기할 것, 5) 무형의 교회를 재건하는 데 집중할 것 등의 재건 원칙들을 확인하는 등 계속적으로 현실태로서 진행되어야 할 통일선교운동과 북한선교의 올바른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나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도, 지금의 남한 개신교 지형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한계는 분명할 것이다. 반공과 친북의 이분법적 논리 속에서는 화해와 평화의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없으며, 남한 개신교 자체가 지금처럼 수도 없이 분열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는 아무리 개교회들이 선교의 열정을 품는다 하더라도 그 분열이 북한선교에도 그대로 이식되는 양상을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동시대적인 선교신학적 성찰이 필요한데,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개신교의 선교방식으로는 현재의 북한교회와 대화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통일 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선교신학적 성찰: ‘Missio Dei’로서의 통일선교를 향하여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한국교회의 여러 선교활동 중 한 민족 구원이라는 당위성, 그리고 과거 교회 번영의 노스탤지어 회귀라는 감수성을 자극함으로써 가장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이 될 수 있었다. 이것에 더하여 실제 존재했던 교회들의 장소와 건물 복원 조사와 각 개교회에로의 교회재건 사명 연계 정책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 어느 선교 내용보다 가시적 목표를 설정해줌으로써 열심을 내기 쉽게 만들었다. 교회당 건축 헌금에 익숙한 신자들은 어렵지 않게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헌금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지나 선교 대상에 대한 이해나 소통이 없는 이러한 일방적 열정은 주택청약적금을 붓고 분양권을 받는 일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분단체제라는 한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대화 없는 배타적 태도는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며 자폐의 세계 속에서 이루지 못할 꿈을 꾸는 것이고, 그것은 복음이나 하느님나라 실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된다. 실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통일 이후에만 그 초점이 맞춰져있던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더 이상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변화하는 북한교회 재건운동은 어느 정도 그 한계를 인식하고, ‘과거에 교회가 있었다는 구실로 교회를 북녘땅에 이식하려는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선교 방식에서 분단체제라는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현재적인 운동 내용의 고민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선교에도 힘을 싣고 있는 듯 하다.

서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통일선교는 교세확장의 뉘앙스가 짙은 북한선교라는 용어보다 좀 더 광의의 개념으로 복음주의적 선교와 더불어 통일에도 관심을 두는 선교이다.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88선언을 시작으로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조그련을 선교의 동반자로 인정하고 함께 평화와 통일을 모색해왔던 것들이 전부 통일선교적 정책이라고 볼 수 있겠고, 늦게나마 그리고 미미하나마 한기총을 비롯한 복음주의권 교단들도 통일선교라는 이름으로 통일 이후가 아닌 지금의 분단체제 속에서의 해야 할 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통일선교는 (그 구체적 내용은 각양각색이지만) 선교신학 담론의 변화선 상에 함께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 터져나온 서구의 식민지 시대의 제국주의적 선교에 대한 반성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낳았는데, Missio Dei로서의 선교가 명명된 이래, 일하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교회는 더 이상 세상(타자) 위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세상과 함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교회는 자신을 홀로 주체라 부를 수 없고 타자는 '(교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 교회는 타자와 마주칠 수 있을 뿐이며,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와 함께, 그리고 곁에서 삶으로 존재함을 통해 그의 자아는 그가 된다. 타자의 존재와 함께 인간은 스스로를 확립해나가고 타자 또한 그렇다. 이러한 Missio Dei 선교신학의 흐름은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이라는 담론 교회와 타자의 상호적 구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신학적 조류 속에서 걸음하고 있는 통일 선교분단이라는 한국적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북한(교회)이라는 타자와 함께 상호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타자와의 마주침과 함께 함의 시작은 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상처를 회복하려는 용기를 가짐으로 가능하다. 먼저 반공주의라는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의 집착과 분노를 끊어내고, 화해와 평화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에 집착한 유형의 교회가 아닌, 3이사야의 예언처럼 새하늘 새땅의 해체와 변혁의 공간을 꿈꾸어야 할 것이다.

 

 

5. 새하늘, 새땅의 통일선교 - 3이사야의 탈성전, 탈권력, 탈분단의 상상력: 분단 사이in-between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이사야 66,1)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 재건 공동체는 팔레스틴 땅에 남아있던 이들, 또는 이주민들(열왕기하 17,24~39, 느헤 5,14이하)과의 갈등 뿐만 아니라 재건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부패와 반목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 느헤미아와 에즈라 일행은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고 잡혼 금지, 안식일 준수, 휴경농법, 부채탕감 등의 개혁을 선포하였다. 이것은 밖으로는 유대지역 중심의 통합을 위해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을 배제하고 단일공동체로 가려는 정책이었으며, 안으로는 느헤미아, 에즈라 이전에 귀향하여 기득권을 차지하고 민중들을 착취하는 지배세력에 대한 심판과 제재이기도 하였다. ‘성전 재건은 이러한 에즈라, 느헤미아의 개혁에서 각 계층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는 핵심적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하느님 현존의 가시적 표징인 성전재건으로 민중의 열망을 모으고 대중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은 체제를 일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낳았겠지만, 서론에서 이야기한 대로 결국 성서역사 전체를 흐르는 차별과 배제의 모티브가 되었다.

 

2이사야의 제2의 출애굽 같은 가슴 벅찬 해방의 메시지와 달리 경제적, 사회적 혼란, 사마리아인, 남아있던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들과의 갈등, 사회적 그룹들 간의 대립 등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에 직면한 귀환 공동체에게, 그리고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 이후를 준비하려는 우리 신앙공동체들에게 제3이사야는 에즈라, 느헤미아의 성전재건 중심의 해법과는 다른 상상력을 제공한다. 3이사야도 성전을 언급하지만, 그 성전은 이방인과 고자 같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이도 환영받는(이사야 56,3) 곳이다. 성전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또한 느헤미아나 에즈라와는 달리 성전 권력의 중심이 되는 구체적 인물이나 집단이 없다. 다른 귀환공동체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전재건 사건을 맞닥뜨리는 속에서 제3이사야의 귀에는 성전에 거는 기대가 아니라 오히려 성전을 짓겠다고 나선 이들에 대한 야훼의 질책이 있을 뿐이다. 야훼 하느님은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2의 엑소더스 공동체에게 성전 재건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제2의 창조, 새 하늘 새 땅의 창조를 선포한다.

성전이 재건된 후에도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구원의 날이 지연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나태와 타락, 탐욕과 이기적 무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 때문이다(이사야 56,9~12; 59,1~8). 야훼의 날의 도래, 구원의 지연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 후의 북한 교회 재건과 복음화를 향해 달려갈 것이 아니라, 분단 체제 속에서 북한이라는 이웃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관계개선의 노력이라는 지금, 여기에 대한 충실한 마주함으로 우리가 희망하고 꿈꾸는 것들이 마치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도래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향해 올 것이다. 우리가 북한이라는 타자를, 북한의 교회를 과거로의 회귀와 노스탤지어의 감성으로 만나는 것은 내가 상정해놓은 모습 속에 상대방을 구겨넣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북한선교와 통일선교는 제3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처럼 그렇게 제2의 창조의 상상력으로 그려가야 한다. 기득권 세력 다툼으로 혼탁해진 성전재건이 구원의 날을 앞당길 수 없었던 것처럼, 배타적인 성전 공동체는 또 다른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지금의 한국교회가 각자의 기득권을 손에 쥔 채로는 똑같은 아픔을 겪을 수 밖에 없음을 성서와 역사는 말해준다. 한국교회가 가진 일체의 권력을 내려놓았을 때, 그 때에서야 그 탈권력 상태의 빈 공간에 모든 존재를 향해 열린 궁극의 세계이며, 구원의 공동체의 새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의 메시지는 분단체제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적 상상력의 해방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유리한 피안의 파라다이즈는 아닐 것이다.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우리를 분단이라는 폭력과 억압으로 얽매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잊고 마는, ‘분단 사이(In-between)’라는 분단통일의 사이, ‘탈분단의 해방공간의 가능성을 제안해보고자 한다.

 

“In-between”은 사이, 관계로 정의되는 ‘Between’에 존재 정체성의 ‘in’의 개념을 끌여들여온 말로 서로 다른 공간 사이에 놓이는 연결지점, 채움을 기다리는 공간을 의미한다. “In-between”을 처음 명명한 호미 바바에게 틈새란 비어있고 문화적으로 버려진 지대가 아니라 문화적 생산이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틈새는 이질적인 공간을 경계와 접경의 지대로 다시 회귀하여 개체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다. 결국 틈새는 기존 패러다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사고로의 전환을 요청하는 것이다. ‘틈새라는 공간에 위치하는 존재는 사이 존재’, 틈새에 낀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이 틈새에 낀 존재가 가진 가능성을 유추해본다(<그림 1>).



사이존재를 소외된 존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양쪽의 체제/컨트롤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때문에 좀더 창의적인 존재일 수 있다. 때문에 이 공간, 영역, 존재는 오히려 상호주체적이며 다양한 가치들이 협상하는 공간일 수 있지 않을까. 새하늘, 새땅의 통일선교는 남의 분단이라는 공간에 갇혀있지 말고 분단/통일의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분단이 보이는 지점’, 이 사이공간에 서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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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nowhere79)
삶에의 진실한 대면. 삶이 녹아있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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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8 한백 하늘뜻나누기

 

분단 "사이in-between"

 

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 계시는 하느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라. 그 백성에게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에즈라 13, 표준새번역 개정판)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머물러 쉴 곳을 어디에다 마련하겠다는 말이냐?’”(이사야 66,1)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비어있는(?) 사이

 

에즈라 1:3

BCE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50~70여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야훼만을 부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왔던 이들이 고향 땅에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하려 했던 일은 바로 성전 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 약탈당했던, 그리고 칙령에 의해 되돌려받은 성전기물들을 가지고 드디어 팔레스틴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 의하면 그들의 꿈이었던 성전재건의 실현은 순조롭지 못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에 의해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했던 그들의 계획은 많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왜 아니었겠습니까. 고향은 이미 그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부모로부터 들은 상상 속에서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간의 세월동안 땅도 사람도 변해 있는 것을 보면서 기대했던 마음과는 달리 당혹스러움이 더 컸겠지요.

낯설어져버린 고향에 살고 있는 알지 못하는 타자들과 그들은 잘 어울려 살아갔을까? 역사의 현실은 그러지 못했던 듯하다. 성전재건 이야기에는 팔레스틴에 남아있던 자들, 공동번역성서에 의하면 제 땅을 갈아먹는 사람들(에즈라4,4-그들은 유다 백성의 기를 꺾어 주고 겁을 주어 성전 짓는 일을 방해하는 한편, .... 성전을 지으려는 계획을 꺾고 말았다)’로 알려진 사마리아인들과의 갈등 이야기가 나온다. 성전재건역사로부터 말도 섞지 않고, 마주치지 않으려 부러 가까운 길도 돌아가는, 2성서시대까지도 내려오는 사마리아인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분단체제, 분단된 상상력

지난 봄, 한 천주교 선교단체로부터 연구의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 마음의 북녘 본당 갖기 운동선교사업을 하려는데 참고하고 싶어서, 개신교에서 벌써부터 해온 북한교회 재건운동에 대한 분석 연구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교회 재건은 해방 이후 교회를 빼앗기고 내려온 월남자 기독교인들의 염원이자, 1990년대 이후 동구공산권의 몰락과 함께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선교적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만든 (한기총을 위시한 주류기독교의) 북한선교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갈 수 없는 북녘 땅에, 그것도 70년 전에 있었던 교회건물의 기억을 더듬어 교회를 다시 짓겠다니,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방식이며, ‘교회건축이라는 익숙한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의 한 단면이므로, 연구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이미 뒤틀린 마음이었고, 연구 결과 현재 북한교회 재건 운동은 수십억의 헌금에도 불구하고/때문에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만, (그리고 그 끊임없는 부침 속에서 어느 정도는 현실을 파악하고 북한선교에 대한 내용 자체를 수정해가려고 노력하는 부분도 발견했습니다만) 그 구체적 내용과 정책들을 보면서 가장 크게 느껴졌던 던 바는 우리가 얼마나 분단된 공간 안에서 분단(한계지어진) 사고를 하고 있는가?”였습니다. 분단체제의 현실 속에서 북한선교를 하겠다는(북한에 교회를 짓겠다는) 생각에는 통일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단공간에 갇혀있는 분단 vs. 통일의 이분법적 사고 속에는, 통일이라는 당위적이나 오지 않은 미래와 분단이라는 현실 사이를 좁힐 그 어떤 상상력과 실천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 또한 그동안 통일이라는 당위성에만 의미를 두었지 분단과 통일 사이에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음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공간空間이라는 것

앞서 탈북이주민들의 탈북루트에서 북과 남 사이의 빈 공간을 보았습니다. DMZ(korean DeMilitarized Zone)이라고 불리는 그 공간에는 겉만 평화인, 사실상 이름과는 다르게, ‘분단이라는 가장 폭력적인 관계가 존재합니다. 공간이라는 것은 실상 비어있지 않습니다. 내가 공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공간은 의미로 존재하고, 공간은 그리하여 나의 세계가 됩니다. ‘공간은 물리적이어서 분명히 경계(한계)가 있고 그 공간에서 한계된 사고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종종 사고는, 상상력은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책으로 읽은 소설을 영화를 보면, 실망할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그래서이고, 박종린 선생님이 한 평의 독방에서 30년을 버티실 수 있었던 이유가 그래서일 것입니다.

분단(한계)된 상상력 속에서 존재는 실상 고립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몇년 전 처음 북중접경지역을 갔을 때 느꼈던 것은 , 남한만 고립되어 있구나였습니다. 그동안에는 북이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북과 중, 북과 러시아 국경 사이에 버스와 기차가, 트럭이 오가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박근혜 정부의 대북관계 대응을 보면, 얼마나 한계된 공간지각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한탄스럽습니다. ‘의 분단이라는 공간에 갇혀있지 말고 나가서 분단이 보이는 지점에 좀 서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새 하늘 새 땅의 공간

성서에 에즈라의 성전재건을 통한 공동체 회복의 메시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시기 제3이사야는 성전이라는 한계된 공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하느님의 새하늘 새땅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2이사야의 제2의 출애굽 같은 가슴 벅찬 해방의 메시지와 달리 경제적, 사회적 혼란, 사마리아인, 남아있던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들과의 갈등, 사회적 그룹들 간의 대립 등 여러 가지 현실적 문제들에 직면한 귀환 공동체에게 제3이사야는 에즈라, 느헤미아의 성전재건 중심의 해법과는 다른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3이사야도 성전을 언급하지만, 그 성전은 이방인과 고자 같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된 이도 환영받는(이사야 56,3) 곳입니다. 성전은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또한 느헤미아나 에즈라와는 달리 성전 권력의 중심이 되는 구체적 인물이나 집단이 없다. 다른 귀환공동체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성전재건 사건을 맞닥뜨리는 속에서 제3이사야의 귀에는 성전에 거는 기대가 아니라 오히려 성전을 짓겠다고 나선 이들에 대한 야훼의 질책이 있을 뿐입니다. 야훼 하느님은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2의 엑소더스 공동체에게 성전 재건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제2의 창조, 새 하늘 새 땅의 창조를 선포합니다.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의 메시지는 분단체제에 갇혀있는 우리에게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간적 상상력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유리한 피안의 파라다이즈는 아닐 것입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우리를 분단이라는 폭력과 억압으로 얽매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잊고 마는, ‘분단 사이(In-between)’라는 분단통일의 사이, ‘탈분단의 해방공간의 가능성을 제안해보고자 합니다.

 

분단 사이In-between

“In-between”은 사이, 관계로 정의되는 ‘Between’에 존재 정체성의 ‘in’의 개념을 끌여들여온 말로 서로 다른 공간 사이에 놓이는 연결지점, 채움을 기다리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존재론적으로는 사이 존재’, 그것도 틈새에 낀 존재가 되겠지요. 저는 이 틈새에 낀 존재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그림 참조).


소외된 존재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양쪽의 체제/컨트롤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때문에 좀더 창의적인 존재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공간, 영역, 존재는 오히려 상호주체적이며 다양한 가치들이 협상하는 공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 분단이라는 공간에 갇혀있지 말고 나가서 분단이 보이는 지점에 좀 서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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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nowhere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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